
안철민 아브라함 신부님
1996년 대구 가톨릭 대학교 졸업 1999년 대전 가톨릭 대학원 졸업 2000년 1월 28일 서품 2000년 2월 - 2001년 2월 봉명동 보좌 2001년 2월 - 2002년 2월 사천동 보좌 2002년 3월 - 2002년 6월 진천 보좌 2002년 7월 - 2004년 2월 캐나다 토론토 성 김대건 안드레아 한인 천주교회 보좌 2004년 2월 - 2007년 2월 청산 주임 2007년 2월 - 2009년 8월 천주교 청주 교구청 사목국 차장 2009년 9월 - Present 샌디에고 한인 천주교회 주임
류지희 비비안나 수녀님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소속
현주소: 16276 California Ave.
Bellflower, CA. 90706
한국 순교자 영성 센터

명 프란치스코 신부님(골룸반 선교회)
우리의 명 신부님.
사제서품일 : 1952년 12월 21일
본명 : 프랭크 매니온
영명축일: 10월 4일
생신: 10월 15일
<양력>
1927년 10월15일 아일랜드 걸웨이서 출생
1952년 12월21일 사제서품
1953년 12월 골롬반 선교신부로 한국 부임
1954~1955년 강릉 임당동교회 보좌신부
1955~1961년 서울 돈암동 본당 주임신부
1961~1968년 강릉 임당동교회 주임신부
1968~1970년 서울 왕십리 본당 주임신부
1970~1972년 한국 골롬반 지부 부지부장(마천동 본당 건립)
1972~1978년 등촌동·상봉동·성남본당 주임 역임하며 4개본당 건립
1978년 11월~1990년 오렌지카운티 한국천주교회(본당 건립)
1978년 12월 15일 샌디에고 첫 미사로 한인공소 시작
1987년 6월17일 애나하임 제2센터(현 토마스교회) 분가
1991년 1월 LA 그레고리교회 보좌신부
1991년 11월 달라스 한인천주교회 부임
1993년 8월 세인트 브루노 미국 성당(위티어 소재) 보좌신부
30명으로 비공식 한국어 미사 시작
1995년 3월 22일 성정하상 바오로 한인천주교회로 명명하고 미사 집전
1996년 7월 성마리아 한인천주교회 발족
2001년 7월 23일 성전 건립 완료 첫 미사
한편, 당시 상봉동까지의 교통이 불편하고, 신흥주택 개발로 신자 수도 증가하자 김진영 프란치스코를 대표로한 70여명의 묵동 지역 신자들이 1974년 5월 6일 ,상봉동 본당 명 프란치스코 신부에게 묵동 공소 설치를 건의하였다. 명 신부는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소속 신부로 개척 정신이 강해 성당 분리에도 적극적이었다.명 신부는 마침 상봉동 본당에 와 있던 구 빠뜨리치오 신부에게 묵동 지역의 신자 가정방문을 하게 하였다. 가정방문 결과, 묵동 지역은 공소보다는 성당을 설립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정춘화 엘리사벳의 인터뷰에서*>
1974년 8월, 명 신부는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의 자금 지원을 받아 동대문구 묵동 238-2번지의 대지 357평을 1,320만원에 구입하였다. 당시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는 300평의 대지 매입금을 지원해주었고 본당 터는 357평을 다 구입해야만 하는 땅이라 명 신부는 그 나머지 대금을 본인의 자동차를 팔아 충당하였다고 한다.
<*강일영 요아킴의 인터뷰에서*>
원본링크 : http://www.mook.or.kr/30_year/mark/mark_1_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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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랜하이츠 성마리아 엘리자벳 성당 주임 명프란치스코 신부(본명 프랭크 매니온·75)가 오는 21일로 사제서품 50주년, 금경축을 맞는다.
아일랜드 출생의 명 신부는 25세 나던 1952년 12월21일 신부서품을 받고 휴전 직후인 1953년 12월 골롬반선교회 일원으로 한국에 파견된 후 한국에서 25년 그리고 남가주 한인사회에서 25년 등 도합 50년의 목자생활을 한국 사람들과 함께 보냈다. 전후 폐허 속에서 재건의 기틀을 잡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한국인들을 위해 정신적, 물질적 지주 역할을 했고 낯설고 물 설은 미국 땅에서 고생하는 한인 이민자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던 부모 밑에서 어려서부터 땀 흘려 농사짓고 수확하는 삶의 기쁨을 터득했다. 지금도 자신이 “사제의 길을 택하지 않았더라면 농부가 됐을 것이 틀림없다”고 말할 정도다. 그의 고향 걸웨이 주민은 100% 가톨릭이었다. 4명의 이모가 모두 수녀였고 바로 위 형도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다니던중 사고로 죽었으며 여동생 2명이 수녀다. 그중 한 명은 한국에서 37년째 간호선교를 하고 있다.
명 신부의 한국말은 50년 경력에 비춰볼 때 유창한 편은 못된다. 전쟁 중에 많은 신부들이 죽고 납치 당해 사제가 부족했던 터라 불과 3개월 한국말 공부 끝에 강릉 임당동성당 보좌신부로 부임했기 때문이다.
1965년 서울로 올라와 돈암동 성당 주임사제를 맡았던 명 신부는 60~70년대 산업화 과정에 따라 서울의 급성장과 더불어 교회 부족 현상이 빚어지자 성당 건립에 앞장서 마천동, 등촌동, 면목동, 목동, 성남 천주교회 등을 건축했다. 70년대 한인들의 이민 물결에 따라 미국내 한인 가톨릭신자도 크게 늘어나면서 미국 교구에서 한국말을 하는 사제의 파견을 한국 천주교측에 요청해온 것이 계기가 돼 1978년 10월 미국에 왔다.
오렌지카운티 순교자 성당에서 11년간 사목을 한 명 신부는 안식년을 거쳐 두 이모들이 수녀로 일생을 보냈던 달라스의 한인성당에서 1년반 사목을 한 다음 미국 교구로 옮겨 일했으나 한인 신자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다시 한국말 예배를 맡게 됐다. 그때가 1995년 2월이었는데 이듬해인 1996년 7월 성마리아 한인천주교회로 독립해 로랜하이츠 알바라도 중학교 강당을 빌려 한국어 미사를 드리다가 1998년 로랜하이츠 고교 앞에 터를 구입했고 지난해 7월 성전을 지었다. 지난주 미사에 참석한 신도수는 650명, 주일학교 100여명을 포함하면 750명의 큰 규모다.
그가 길러낸 사제들도 적지 않다. 첫 부임지인 강릉 임당동 천주교회 시절 7세 어린이였던 오영민은 지금 북가주 오클랜드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주임사제, 1978년 순교자 성당에서 9학년 학생이었던 김알렉스는 현재 성토마스 성당의 주임사제고 김로이 신부, 하알렉스 신부 등도 제자들이다.
성마리아 성당의 추토마스 사목회장과 서마리스텔라 수녀는 명 신부가 “신자들이 선물이나 옷을 가져오면 이를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은 낡은 옷에 검소하게 살아가는 청빈한 사제며 성품이 온화하고 특히 한국인을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에 신자들이 많이 따른다”고 입을 모은다. 사제관으로 명 신부를 찾아 금경축을 맞는 심경을 들어봤다.
사제서품 50주년이란 김수환 추기경도 지난해에야 맞았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고 특히 일선 신부로 활동하며 맞는 일은 드물다는데 50주년이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는가
-교우들이 그냥 지나갈 수 없다고들 해서 할 수 없이 기념 책자를 출판하기로 했지만 숫자가 큰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50년 동안 목자 일을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 드릴 따름이다.
75세의 고령인데 은퇴는 언제쯤 할 계획인가
-건강이 허용할 때까지 계속 일할 생각이다.
한국에 파송된 계기는
-신부서품을 받고 골롬반선교회 일원으로 외방선교를 명령받았다. 원래 중국으로 갈 예정이었으나 중국의 공산화로 말미암아 한국으로 변경됐다.
한국에서의 선교가 힘들지는 않았는가
-한국은 불교의 뿌리가 깊은 나라로 한국 사람들의 종교에 대한 의식과 관심은 다른 나라에 비해 수준이 높은 편이다. 종교에 대한 의식은 기독교나 불교가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한국 사람들은 또한 정이 있는 민족이다. 당시 지도하던 고등학생들로부터 한국말을 배우고 나는 영어를 가르쳐 주며 친하게 지냈는데 지금도 소식을 주고받는 이들이 10여명이나 된다.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 됐지만.
신도들이 주는 선물이나 돈을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줘 버린다고 하는데
-신부, 특히 노인에게 무슨 돈이 필요하겠는가. 우리가 어릴 적에는 가난했기 때문에 돈을 쓰는 일이 없었고 그런 습관이 몸에 배었다. 한국 노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요즈음 아일랜드에 가보면 젊은이들 돈을 물쓰듯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게 된다. 한국 젊은이들도 비슷하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는 소비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경제활동도 원활해지지 않겠는가. 요즘 젊은이들을 우리와 비교할 수는 없다.50년 사목 활동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어떤 신부가 50년 중국선교를 마친 후 쓴 책을 읽었는데 “좀 더 열심히 선교를 하지 못한 일을 후회한다”고 했더라. 나도 같은 심정이다.
신도들에게 들려줄 말씀은
-축하드린다, 미국 땅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에게. 하느님을 잊지 말아라. 아무리 부를 이루었다고 해도 하느님을 잊고서는 행복할 수 없다.
매신부님.
매 데스몬드(Desmond Maguire)
1929년 7월 9일 출생
1948년 6월 성 베네딕도 고등학교 졸업
1948년 9월 성 골롬반 선교 신학교 입학
1955년 - 1956년 미국 유학
1956년 - 1970년 한국 광주교구 임동본당, 북동본당,
산정동 본당 주임사제
겸 골롬반회 책임신부
1970년 - 1980년 제주교구 서귀포 및 한림 본당 주임사제
1980년 - 1993년 미국교포 사목
1985년 - 1993년 샌디에고 한인 공동체 주임사제
및 피닉스(Phoenix), 투산(Tucson) 지역 교포사목
1993년 7월 20일 선종
추석이 지나고 나서는 바람이 제법 서늘해지고 완연한 가을 기운이 느껴진다. 이렇게 해서 또 한 여름이 가고 우리 샌디에고 한인 천주교 공동체는 창립 10주년을 맞게 되었다. 10년 전에 우리 공동체 사목을 위해 부임해 오셔서 Holy Family Church에서 창립 첫 미사를 집전하셨던 매신부님(Desmond Magquire)께서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1956년 27세의 나이에 한국으로 부임해 오셔서 199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심장수술을 받으신 후 64세의 나이로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을 한인 사목에 바치셨다. 매신부님을 생각하면 샌프란시스코에서 신부님의 장례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느꼈던 그 밝고 편안해졌던 느낌, 슬픔과 분노와 자책으로 무거웠던 마음이 가벼워지고 영화 '벤허'의 이야기가 갑자기 떠올랐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파멸로 몰아넣은 옛 친구와 로마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에 불타는 유대인 청년 벤허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도 자신을 못박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을 보고 오랫동안 자기 자신을 괴롭게 했던 증오와 복수심을 버린다. 그 순간 문둥병으로 흉하게 일그러졌던 어머니와 여동생은 병이 나아 아름다웠던 원래의 모습을 되찾게 된다. 결국 밴허의 증오와 복수심은 아름답던 어머니와 여동생을 통해서 흉하고 일그러진 문둥병의 모습으로 드러났던 것임을 기도중에 선종하신 신부님께서 깨닫게 해주셨던 것이다.
신부님께서는 광주, 목포, 무안, 함평 그리고 제주도에서 사목활동을 하셨는데 가끔 그때의 일들을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시곤 하셨다. 신부님께서는 그 옛날 일들을 놀랍도록 생상하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간직하고 계셨던 것이다. 신부님께서는 우리가 주님과 한 식탁에서 식사하고 또 주님을 모시고 예루살렘을 향한 신앙의 여행 도중에 만나게되는 장님들은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듣고 보고서도 깨닫지 못하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며 또 그 여행 중에는 2천년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일들이 일어나기 마련이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하여 제자들과 함께 여행을 하시는 도중 제자들은 다가올 새 왕국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서로 다툰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받으실 수난에 대해 세 번이나 말씀하여 주셨지만 욕심과 야심에 가득찬 제자들의 귀에는 와닿지 않는다. 그들은 십자가에 목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야 비로소 그 말씀들을 이해하였다.
신부님께서는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시곤 하셨는데, 그것은 곧 생활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스스로 답변해 주시기도 하셨다. 또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신 후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시곤 하셨는데 이것은 기적이나 놀라운 표시를 보고 믿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도 말씀하여 주셨다.
신부님께서는 자신의 소유하고 계신 것은 물론 선물로 받은 것들도 자신보다 더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셨다. 풍족하지 못했던 우리 공동체 살림을 아셨던 신부님께선느 우리 동공체에서 한달 생활비로 드렸던 이백불 혹은 삼백불의 사례비를 사양하시는 경우가 많았으며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우리 공동체의 주일 헌금이 이백불이 채안될 때에는 그때마다 신부님 수중에 있는 돈으로 이백불을 채워 본당에 가져다 주시곤 하셨다.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대하는 눈을 뜨게 하여 주시려고 노력하시던 신부님.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으신대도 불구하고 매일같이 병자들과 어렵과 소외된 사람들을 방문하시던 신부님. 몇 명 되지도 않는 에비자들을 기다리느라고 쌀쌀한 저녁 날씨에 모자까지 쓰시고 문밖에서 서성거리던 신부님. 자신의 강론을 기억하고 이해가 안되는 부분에 대해 질문을 하면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시던 신부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던 신부님께서는 지금 샌프란시스코 근교에 있는 Holy Cross Cemetery에 잠들어 계시지만 그 곳에는 연고자도 별로 없고 찾아보는 이도 많지 않은 것 같다. 어쩌다가 샌디에고 본당 신자들이 근처를 지나는 길에 둘러보는 정도이니, 우리를 가르치시면서 일생을 바치신 신부님께 우리가 너무 소흘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한때 분열된 모습을 보여 드려 신부님을 가슴아프게 해드린 적이 있는 우리는 이제 서로 화목하고 단합된, 주님이 보시기에 좋은 공동체의 모습으로 신부님을 기억하는 사업을 해 보았으면 하는 바램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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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을 PDF로 받아서 하나하나 여기에 옮기면서 가슴부터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에게 이 글을 읽고 옮길수 있는 은총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게됐습니다. 우리는 무수한 은혜를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모든 은혜는 하느님으로 부터 옵니다. 하느님께서 은총을 나눠주시기 위해 필요하신 도구를 자처하신, 우리 주변의 많은 분들께 우리는 충분히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까?
샌프란시스코에 잠들어 계시다는 점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 알수는 없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고 자신은 대접받는 것에 익숙치 못한 사랑많은 노신부님의 마지막 사랑의 실천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저는 살아 생전에 뵌적은 없지만, 샌프란시스코에 가게되면 무슨일이 있어도 꼭 찾아뵙고 기도 올리겠습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으로 사셨던
양노엘(본명 Noel Ryan)
< 약 력 >
1938. 12. 26. 아일랜드 출생
1957. 9. 골롬반대신학교 입회
1963. 12. 22. 서품
1964. 한국파견
1964 ~ 1965 한국어 공부(돈암동 본부)
1965 ~ 1967 춘천교구 묵호성당 보좌
1967 ~ 1968 한국어공부(돈암동 본부)
1968 춘천교구 철원성당 임시 주임
1968 ~ 1969 서울교구 돈암동성당 보좌
1969 ~ 1972 골롬반 본부 재정담당
1972 ~ 1978 서울대교구 북부 J.O.L(가톨릭노동청년회) 지도신부
1978 ~ 1982 서울대교구 면목동성당 주임
1983 ~ 2008 LA, San Diego에서 한인교포 사목
2008. 11. 17. 선종

찰스 김, 전 한미연합회 전국회장
여러분들께서는 천주교의 양 노엘 신부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실 것입니다. 신부님하면 그저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오르시겠지만, 한인천주교인들의 거의 대부분은 이 분이 누구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이 분은 성이 양씨지만 1938년에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25세에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그 다음해에 한국으로 파송되어, 84년에 밸리 한인천주교회 담임으로 부임하기까지, 20년간을 한국에서 지냈습니다.
그 분이 한국에 계시던 기간은 군사혁명후로, 한국이 경제적으로는 발전했지만,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는 암울하고 혼란스러웠던 때였습니다. 20대와 30대의 혈기왕성한 시기를 한국에서 보낸 양 노엘 신부는, 사회정의를 외치다가 추방위기를 당한 적도 있지만, 한국의 민주화와 성장을 몸으로 체험하신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한국에서 오래 살고, 또 한인천주교회 여러 곳에서 주임신부를 맡으셨기 때문에, 아이리쉬지만 코리언 아메리컨이나 다름없었던 분입니다. 파란 눈의 코리언인 양신부님은 안타깝게도 지난해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분을 두 번 뵌 적이 있는데, 한 번은 결혼식에서였습니다. 양 신부님이라고 해서 한인신부님인줄 알았는데, 아이리쉬 신부님이라 신기한 느낌을 받았었고, 그 분이 강한 외국인 악센트로 주례사를 하시면서 “오늘 결혼하는 두 분이 짜식을 낳고” 자녀나 자식이 아닌 짜식을 수차례나 반복하셔서, 결혼식에 참석했던 분들과 함께 웃음을 참느라고 고생한 기억이 납니다.
최근에 그 분의 사제서품 45주년을 기념해서 발간한 “어느새 지나가 버리니”라는 책을 한 권 선물 받아서 읽고 있는데, 그 분의 강론은 이해하기가 쉽고, 또 이웃집 아저씨가 다정하게 이야기해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약 절반정도 읽었는데, 제가 용서받아야만 하는 일들을 많이 해서 그런지, 좋은 말씀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너는 용서받았다”라는 글이 마음에 와 닿아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미국에 있는 어떤 묘지의 비문에는 이름이나 사망연월일은 없고, 단지 십자가와 함께 단지 “용서 받았다”라고만 되어있다고 합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사실 죽고 나면 이름은 물론이고 뭐가 그리 중요 한가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나는 잘났다, 훌륭한 사람이다, 일류학교를 다녔다가 아니라, “나는 용서받았다”는 신앙고백을 비문에 적은 그 분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양 신부님은 용서란 첫째로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두 번째로는 짐을 들어준다는 것이며, 세 번째로는 놓아준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은혜를 베푼다는 것이라고 강론하셨습니다.
용서받지 못한 마음은 고장 난 기계나 자동차와 같다고 하셨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용서 할 줄 알아야하며, 우리가 용서 받은 것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남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 자신이 용서를 받아야하지만, 동시에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해야하고, 또 내가 용서받은 것처럼 남을 용서하라는 메시지가 오랫동안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용서받기위해 노력하지만,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남을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를 받았으면서도 용서를 받았다는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기독교인이나 천주교인, 또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아 자유를 누리시기 바라며, 놀부의 심정으로 남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무런 대가없이 용서받은 것처럼, 남을 대가없이 진정으로 용서하면서, 더 큰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양 신부님은 분명히, 용서받고 용서하며, 성공한 삶을 사신 분인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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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02.04 사제 서품
1996.01.30 ~ 1997.06.30 노안 주임
1997.07.01 ~ 1999.09.01 샌디에고 한인 성당
1999.09.02 ~ 2002.09.05 영산포 주임
2002.09.06 ~ 현재 교구청 성소국장

1993. 2. 4 사제서품
1995.02.03 ~ 1999.09.01 군종
1999.09.02 ~ 2000.07 샌디에고 한인성당
2000.08.25 ~ 현재 장흥 주임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서품축일 : 1991년 6월 29일
영명축일 : 9월 29일
<약력>
1987 대구 가톨릭 대학 졸업
1991 대구 가톨릭 대학교 대학원 신학과 수료
천주교 봉명동 성당 보좌신부
1992 음성 꽃동네 보좌신부
1993 천주교 삼성성당 주임신부
1994 가평 꽃동네 담임신부
1997 천주교 괴산성당 주임신부, 성신유치원장
1998 꽃동네 현도사회복지대학교 사무처장
2003 학교법인 꽃동네 현도학원 사무처장
서울 가톨릭 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석사 졸업
꽃동네 준본당 주임 및 행정실장
2005 - 2009.9 미주 샌디에고 한인 천주교회 주임신부
링크:한국일보 자료 - 반영억 라파엘 신부 훈화집 ‘신을 벗어라’
링크:[화제의 책] 사랑합니다 1·2·3 / 반영억 신부
링크:주님의 목소리를 들으려 귀를 세우고
* 슬라이드는 계속 사진이 추가됩니다.
4년반만에 귀국하는 반영억 신부
입력일자: 2009-08-29 (토)

‘사랑합니다’외치며
누구에게나 함박웃음
남몰래 사랑 실천
“사랑합니다”
언제나 ‘사랑’을 외치며 평화를 찬미했던 샌디에고 한인천주교회의 반영억 라파엘 신부(사진)가 4년반 동안의 사목임무를 마치고 오는 9월 중순 귀국한다. 지난 2005년 4월10일 부임해 첫 미사를 집전했던 반 신부는 충북 음성 출신으로 대구 가톨릭대학 졸업 후 1991년 사제서품을 받은 뒤 청주교구 소속의 괴산·삼성본당 신부를 거쳐 꽃동네 대학에서 9년간 가난한 이들의 복지와 교육에 헌신해 왔다.
‘사랑’이라는 닉네임이 붙어다니는 반 신부는 4년 전 200여명에 불과했던 신자를 현재 500여명이 넘는 큰 한인 성당으로 성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새 성전을 건립하는 역사적인 일을 주도했다.
특히 반 신부는 전쟁의 폐허로 어려웠던 1953년부터 외국 신부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헌신하며 많은 성당 건립과 어려운 이웃을 위해 평생을 바친 프랭클린 명 신부를 부모처럼 섬기며 한국의 풍습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여 많은 신자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사랑의 실천을 몸소 보여주며 은퇴한 명 신부를 끝까지 잘 모셔야 된다는 경로사상을 실천하고 있는 반 신부는 임기 말 누수현상 없이 모든 신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고 한청일 사목회장은 말했다.
반 신부는 SD 재임기간 각종 신심단체를 지도하는 가운데에서도 ‘신을 벗어라’ ‘사랑 합니다’ 시리즈 등 4권을 저술했으며 ‘남가주 성령쇄신대회’를 비롯, 많은 영성집회에 지도신부로 활약하기도 했다.
어린아이의 미소를 닮은 함박웃음으로 “사랑합니다”를 외치는 반 신부는 “처음 새 성전을 지었을 당시 개방하여 많은 지역 교민들과 활발한 교류를 계획했으나 생각만큼 실천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며 내년에는 지역사회를 위해 보다 많은 것을 공유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회고했다.
어려운 이민생활 속에서 언론에 보도되는 한인사회의 분열이 무엇보다 가슴 아프다는 반 신부는 “분열과 갈등에 대한 어려움이 있지만 서로 위로하고 더불어 살아야하며 지역 어른(리더)들이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주시길 소망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한인 신자들로부터 절대적인 존경을 받는 반 신부는 개인 용돈마저 내놓으며 남몰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의 전사다운 면모를 아낌없이 쏟은 샌디에고를 뒤로하고 이제 청주시 노인종합복지관 관장으로 새로운 순명을 받들기 위해 또 다른 여정을 시작한다.
<최갑식 기자>
초기 본당신부 경험을 쓰신 강론글인것 같습니다. 인터넷에 있어서 옮겨왔습니다.
신부님이 선택하신 성경구절도 나오네요.
신부의 꽃은 본당신부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본당신부가 되기를 바랐습니다.본당신부가 되면 온갖 열성을 다해 신자들을 위한 일을 추진하고
시간 가는줄 모르고 회합을 주도하며 술판도 벌이려고 했습니다.하지만 신자들은 젊음에 불타는 시행착오를 결코 바라지 않습니다.
급기야 이것저것
"안됩니다. 다음으로 미루시지요!" 하며 제동을 겁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오기가 생겨서 더 고집하고 밀어붙입니다.신부는 대장이니까요.
감히 평신도가 '뭐? 본당신부에게 이래라 저래라 해? 따라오면 되지.'
건방지게 내심 이런 마음을 갖기도 합니다.입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이 밉기까지 하고,
회합할 때 은근히 빠져 주기를 바랐습니다.그리고 그런날 중요안건을 결정해서 입을 막아버리려 하는데
꼭 참석을 하니 꼴보기 싫었습니다.
'저놈은 몸살도 안 나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공소에서 승격된지 2 년이 채 안된 본당이지만 본당신부 발령을 받고
열성을 다하리라, 마음껏 뛰어보리라, 다짐을 했습니다.그러나 기쁨도 잠시,
경륜이 많으신 전임 신부님 때문에 도무지 빛이 나질 않았습니다.
열심히 해도 어린아이 취급을 하니 답답했습니다.은연중에 자기들이 결정하고 원하는 대로 따라오길 바라니 화가 납니다.
말끝마다 ' 전에는 이랬는데.' 할 때는 정말 참을 수 없었습니다.
'전에는 그랬지만 지금 본당신부는 나란 말이야! 무슨 소리 하고 있어!'
속으로 외치기도 합니다.어느날 강론 때 그랬습니다.
'본당 수녀원을 건축하는데 적극 협조를 해주십시오. 특별히 공소 신자분들도
기금을 적립한 것이 있으면 우선 본당을 위해 모두 봉헌해 주십시오.
그러면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채워 주실 것입니다.
몽땅 내놓으십시오!'며칠 뒤,
공소 신자분들이 식사대접을 한다 해서 나갔는데..
한참 술잔이 오가더니만 난데 없이
" 야, 임마! 네가 본당신부냐? 신부면 다냐! 니 마음대로 다하냐?"
참으로 당혹스럽고 얼떨결에 당했습니다.그래서 맞받아 쳤습니다.
"그래 임마! 나 신부다! 신부 알기를 우습게 아냐? 신자면 신자답게 살아야지.
술 한잔 했다고 그러면 되냐?"옆에 있던 신자들이 그 형제에게 신부님께 그러는게 아니라고 말렸지만..
속으로는 자기들을 대변해 주어서 고맙다는 눈치입니다.
'그래, 너 잘했다!'
박수 치고 있는 듯 했습니다.술맛이 뚝 떨어졌습니다.
"회장님, 그만 갑시다."
자리를 박차고 나왔습니다.너무 분한 마음에 며칠동안 잡히는 게 없었습니다.
'온갖 정성을 쏟았는데 이게 뭐야! 신부에게 그럴 수가 있는거야?'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미워질 뿐입니다.
'네가 신부에게 그래놓고 편히 잘 있나 어디보자..'감실 앞에 앉아도 그놈이 자꾸 떠오릅니다.
"주님! 이럴 때는 어쩌지요? 주님 말씀 좀 하십시오"
씩씩거리기를 며칠, 감실의 예수님께서
" 너는 내 마음을 아니? 너.. 신부라고 폼잡다가 한 방 맞고 뭘 그러냐?
너 신부 될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
하시는 겁니다.그때 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품으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품으십시오.'
(필립 2,5)
서품 때 선택했던 말씀을 찾아 내었습니다.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도 참 못된 놈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커녕 미움을 키워가고 있었고 먼저 용서를 청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으니까요.삶의 경륜을 무시하고 자기 고집대로 살려고 했으니 부끄럽습니다.
형제에 대한 미움 때문에 주님 앞에 선 것이 은총이고 복입니다.
그 형제가 은혜의 도구였습니다.
그가 아니였다면 아마도 더 교만해지고, 하고 싶은 것이면 무엇이든지
우격다짐으로 밀어부쳤을 것입니다.그랬다면 오늘도
"야! 임마! 네가 신부냐?"
하는 소릴 얼마나 더 듣고 있을는지..'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를 견책하시고 아들로 여기시는 자에게
매를 드신다'(히브리12.6) 하셨는데,
견책의 도구로 그 형제을 축복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오늘,
그형제에게 기쁨의 전화를 할 수 있는 은총을 주셔셔 고맙습니다.
주님의 이름은 찬미를 받으소서.
안철민 아브라함 신부님
서품축일 : 2000년 1월 28일
영명축일 : 10월 9일
*약력
1990년 대구 가톨릭 대학교 입학 - 1996년 대구 가톨릭 대학교 졸업
1997년 대전 가톨릭 대학교 연구과 - 1999년 대전 가톨릭 대학원 졸업
2000년 1월 28일 서품
2000년 2월 - 2001년 2월 봉명동 보좌
2001년 2월 - 2002년 2월 사천동 보좌
2002년 3월 - 2002년 6월 진천 보좌
2002년 7월 - 2004년 2월 캐나다 토론토 성 김대건 안드레아 한인 천주교회 보좌
2004년 2월 - 2007년 2월 청산 주임
2007년 2월 - 2009년 8월 천주교 청주 교구청 사목국 차장
2009년 9월 - Present 샌디에고 한인 천주교회 주임
*기억해야할 날들
9/24/2009 샌디에고 처음 도착
9/27/2009 샌디에고 취임미사 봉헌
10/04/2009 브롬주교님 집전 이취임미사
*슬라이드쇼는 계속 update됩니다.


최아녜스 야고보 수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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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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